나를 제외한...
by 스윗피
카테고리
유리기







아직도 손이 덜덜 떨린다. 심장이 억죄어 오는 것 같고, 소름이 돋는다. 이렇게 후유증 강한 소설은 가시연, 아가씨, 종이비누 이후로 처음. 어젯밤, 정확히 새벽 4시. 유리기의 마지막 구절을 읽고 워드패드를 닫는 순간. 여운이 남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찌꺼기 처럼 내 심장에 내려 앉은 여운을 덜어내 버리려고 블로그를 열고 포스팅을 하려고 했는데.. 자판 위의 손가락이 도저히 움직이지가 않았다. 결국 아무것도 못하고 멍하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침대 위에 누워 뜬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하얗고, 우아하고, 단단하지만.. 잔인하고 유약하고 흐릿한 박유천.

 

어떻게 하면 이렇게 찬양일색인 소설을 쓸 수 있을까!(그렇다고 무작정 찬양하기 위한 소설은 아님) 소설을 읽을 때 주인공이 아닌 사이드 인물에 마음을 뺏기는 타입이지만, 유리기를 읽는 내내 김재중이 아닌... 박유천에게 온전히 내 심장을 내 맡겼다. 불같지만 저열하고 치열한 두 사람의 사랑. 마치 뫼비우스의 띠 처럼 만나듯, 만나지 못하듯 치열하게 얽혀 있는 둘의 사랑에 마치 나는 전투라도 하듯 힘겹게 스크롤바를 내렸다.

 

만약에 정상적인 나 였더라면, 분명 김재중을 응원했어야 맞다. 누구나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완벽한 남자 김재중. 김준수는 김재중을 몇 번 만나고서 막연한 호감을 갖는다. 다른 소설이었으면, 아니 다른 등장인물 같았으면 육년동안 치열한 사랑에 온몸을 내 맡긴 사람이 고작 몇 번 만난 타인에게 마음을 연다는 것은 개연성도 없고 급작스런 전개라 코웃음을 첬을테다. 하지만, 김재중이라서 너무 숨막히게 짙은 김재중이라서.. 김준수의 마음도, 이렇게 글을 쓴 작가님도.. 몽땅 이해가 된다. 흑백 수채화 같이 아름답고 고고한 김재중. 상상만 해도 가슴이, 욱씬하다.

 

 우정? 사랑? 연애? 교류? 교감? 나는 모든 것을 그와 하고 있다. 그와 풋풋한 우정을 나누었고 지리멸렬한 애정을 쏟아 붓고도 있으며 외로울망정 그와 연애하는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우리는 영혼을 교류하고 삶을 교감한다. 아... 무엇이 나를 이렇게 고독한 인자로 만드는지.... 이 모든 것은 박유천 때문이고, 그의 한낱 육체와 정신을 사랑하는 나 때문이다. 무엇을 원망 할 수도 없다. 

 

 

세상에 어떤 문장이, 어떤 소설이 이 보다 구구절절하고 너덜너덜해져 이젠 신물이 나는 짝사랑을 묘사할 수 있을까? 이 문장, 이 구절을 읽을 때 나는 심장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만약 내가 흡연자 였다면 아마 이 대목에서 담배를 피워야 했을 거다. 원래 사랑의 패자는 어쩔 수도 없이, 내 모든 것을 가저간 승자를 원망할 수 밖에 없다. 현재, 나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그를 원망하면서 나에 대한 모멸감을 함께 느끼게 되는 것이고.

 

이렇게 내 생각을 쏟아 냈는 데도, 아직도 내 심장에서 유리기, 라는 글자가 떠나지 않는다. 이 소설에 대해서 논술을 쓰라고 해도 몇 자고 채울 수 있을 심정이다.

 

애초부터, 이런 소설이 탄생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저 잔인한 박유천에게 있다. 그에게는 사람을 잡아 끄는 이상한 마력이 있다. 박유천만이 가진 아우라, 사람을 타락시키는, 선한 아우라.. 모든 모순되고 충돌하는 형용사를 함께 수식하는 악마같은 천사. 루시퍼가 존재했다면 박유천의 형상을 하고 있지 않을까.....

 

봄에는 새싹같고, 여름에는 바람같고, 가을에는 하늘같고, 겨울에는 눈 같은... 박유천.

 

어떤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도 아깝지 않을 박유천이라는 영혼에 나는 오늘도 매료당하고 농락당한다. 한낱, 연예인에게 내 영혼을 내 맡기면서.....

 

 

 

나는 그 때 담양 대나무 숲에서, 그 까만 머리를 한 소년 같은 얼굴을 마주 대했을 때를 언제라도 떠올릴 수 있다. 그 날 그 새벽의 어렴풋하고 애매모호한 감정의 교차, 우리가 처음 만났던 순간 안개처럼 흐르는 환희.

 “무슨 생각해.”
  “..네 생각.”

 

시간이 지날수록 내 자신이 혐오스러워지고, 김재중은 외로워지고, 박유천은... 망령처럼 슬퍼진다.

 

  “시키지도 않은 거짓말만 자꾸 늘어.. 김준수. 큰일이야.”
  “우리 미국 가면 고양이나 키울래? 아.. 강아지도 좋아.”
  “너 키우기도 바빠, 난. 고양이? 아서라 아서. 너랑 매일 싸우겠다.”
  “그런가..”
  “나무 같은 거 키우자. 행운목.”
  “음... 좋다.. 행운목.”

 

  그런 나무라도 예쁘게 잘 키우면 나도 비로소 행복해 질 수 있을까. 행운목. 검고 답답한 수트를 입은 재중이 나를 돌아보면서 잠깐 웃었다. 언제부터인가 저 웃는 얼굴만 보면 눈물이 날 것 같다.

 

 

 

***

 

 

 

 

 

  재중아, 잘 지내? 나와 유천이는 잘 지내고 있어. 비가 왔다가 방금 막 하늘이 개었다. 뉴욕의 날씨는 아직도 많이 춥니? 아, 내 감기는 이제 다 나았어.

 

 

내 감기는 이제 다 나았어... 아아 잔인하고도 또렷한, 비수같은 저 한마디.... 이 문장이 당분간은 내 뇌속에서 떠나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다.

by 스윗피 | 2008/04/24 19:49 | totally fucked up | 트랙백 | 덧글(1)
트랙백 주소 : http://sweetpea11.egloos.com/tb/273817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Noda at 2008/07/06 01:07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에요. 팬북은 딱 두개를 샀는데 그 중에 하나이기도 하고요. 가끔씩 유천이가 그리운 밤에 펼쳐보면 늘 마음을 답답해지고 말죠...마리화나님 글이 보통 이래요. 유천이를 화면으로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도 많고요. 마리화나님 글을 읽으면.....아, 지나가다 제가 무척 좋아하는 소설 이야기라 이렇게 글 남기고 가요~ㅎ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최근 등록된 덧글
최근 등록된 트랙백
이글루 링크
rss

skin by 이글루스